아이들은 서로를 부러워하며 자라고 있었다
네 아이 중 막내인 우리집 초5는 아빠에게 이런 호소를 하곤 한다.
“아빠, 친구 상준이는 혼자라 자신이 살 수 있는 거는 모두 사고, 핸드폰도 1학년 때부터 있었어. 그 친구 집에 가봤더니 자기 방도 따로 있고, 다른 방 하나는 장난감과 놀이기구가 가득 차 있던데.” (두 눈동자에 부러움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아, 외동인 친구가 많이 부러웠구나. 우리 막내는 장난감은 부족해도 누나들과 형이 있어서 좋은 점도 있지 않아?”
“그렇긴 한데, 맛있는 거 먹을 때도 그렇고, 형이 입던 옷이나 물건을 물려 입는 것도 그렇고... 상준이는 이번 방학에 엄마랑 제주도에 한 달 살기도 간다고 그러던데...”
“그러면 우리도 며칠 제주도 여행이나 가볼까? (아이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심하게 끄덕였다.) 그런데, 혹시나 상준이는 누나들과 형이 있는 우리 막둥이를 부러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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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막내는 외동인 친구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한 명에게 집중되는 물질적 혜택과 형제들과 나눌 필요 없는 독점의 유혹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대화를 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많이 보고 듣고 말하는 요즈음의 아이들은 서로의 형편을 부러워하면서 성장하고 있지 않을까? 부모들의 바람이나 걱정과 상관없이…’
자녀를 가진 모든 부모에게 고민은 숙명이다
친구 네 명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자녀들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그중 두 명이 각각 외동아들과 외동딸이 있었고, 한 명은 딸 둘, 나머지 한 명은 네 명이었다. 우연이지만 대략 최근의 한 자녀 비율과 엇비슷했다. 2021년 말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출생률)은 0.81명이다. 지난 15년간의 합계출산율도 1.18명에 불과하다. 저출산 문제는 한 국가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는 중차대한 이슈이지만, 각종 사회경제적 환경과 부모들의 가정철학이 결부된 영역이라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
아이들에 대해 말하다 보면 연령대와 성격에 따른 교육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친구들 대부분이 20대 자녀들을 둔 터라 대학과 취업까지 대화 주제가 확산된다. 아이들의 숫자와 관계없이 ‘부모’라는 보람과 더불어 ‘부모’로서의 고민거리도 깊어지는 모양새다.
외동아들을 둔 친구는 교육에 지극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영어유치원과 사립초등학교를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각종 사교육으로 상당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아이가 의대에 진학하기를 바랐지만, 친구의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않는 눈치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이 친구는 가족 내 비교 대상이 없다 보니 다른 친구들의 케이스를 자주 묻곤 한다. 친구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아이들의 숫자에 따른 교육 비용의 차이는 분명했다. 외동일수록 선택과 집중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부모가 맞벌이고 경제적 여유가 많을수록 아이에 대한 집중은 더 심화된다. 주위의 지인들이나 직장동료들의 사정을 들어봐도 비슷한 상황이다.
아이가 세 명 이상인 다둥이 가족의 경우는 각기 다른 아이들의 캐릭터와 아이들 간의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부모 아래서 태어났어도, 아이들의 성향과 생활방식은 머리 숫자만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동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양육과정이 더 수월할 리도 없다. 바람 잘 날 없는 것은 나뭇가지의 수와는 크게 관계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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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아이에 대한 특별한 양육방식이 필요할까?
맞벌이로 인한 육아 환경 때문에 아이를 하나밖에 낳을 수 없었던 친구의 얘기다.
“어린 딸이 혼자서 노는 걸 보니까 왠지 마음이 짠하고 서글퍼지는 거 있지. 자기 피붙이 형제가 있었다면 아웅다웅 싸우면서도 잘 놀 텐데. 우리 부부는 지금도 그걸 엄청 미안해해. 그 녀석이 한참 자랄 때까지도 외로워하거나 심심해하지 않게끔 무지 노력을 했지.
알다시피 외동아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많이 있잖아. ‘외동은 홀로 자라기 때문에 사회성이 부족할 수 있고 협동심과 배려심이 부족하다, 외동아이는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강하고 외로운 성격일 수 있다…’ 이런 것들. 실제로 우리 아이도 자라면서 많이 외로워하고 심심해했었어. 엄마한테 동생 낳아 달라는 얘기를 수백번도 더 했을 거야.
그러다 보니, 엄마 아빠가 번갈아 가면서 부모와 친구 역할, 형제자매 대역까지 해주는 게 하루 일과였고, 우리 부부는 늘 노심초사했던 것 같아.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되도록 친구를 많이 만들어주고 싶었고, 그러려면 다른 아이들 학부모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아이 엄마가 이중삼중으로 고생을 많이 했어. 나도 마찬가지고.” (그 덕분에 아이 친구 부모들과 좋은 인연을 맺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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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1번지로 유명한 친구의 동네에는 외동을 기르는 부모들이 많아 서로 서로가 필요한 존재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매개로 양육과 교육, 학교와 학원까지 각종 정보와 의견을 교환했다. 친구는 다양한 배경과 지식을 가진 부모들과 접하면서 아이를 기르는데 필요한 실전적 경험을 얻었다고 한다. 그 결과 억지 친구 맺기나 불필요한 생일파티를 줄이고, 부모와 아이 간의 다양한 활동과 적절한 스킨십을 통해 아이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존중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외동에게 외로움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보니까 그것은 큰 착각이었던 같아. 그냥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을까, 라는 관념에 불과했던 거지. 그리고 또 하나 잘못된 편견이라고 얘기하고 싶은 게, 외동들에게 협동심이나 배려심이 없다는 건, 원래 아이에게 없는 게 아니고 부모들이 그렇게 환경을 만든 게 아닐까 싶어. 아이의 소유욕이나 이기심은 부모들이 아이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타인과 서로 나눌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
친구는 외동아이를 키우면서 좋았던 점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미안해하고 고민이 많았지만, 아이와의 친밀감이 더 찐하다는 점과 육아에서 빨리 해방되는 장점도 있다면서 웃었다. 혼자여서 아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데 큰 부담이 없었고, 많은 일들을 아이 스스로 해결하면서 자존감이나 자기 주도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친구는 은근히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줄줄이 매달린 네 명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잠시 육아에서 먼저 벗어난 친구가 부러웠다. 오랜 시간 사회에서는 외동아이 캐릭터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고 고정관념을 형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혼자 크면서 가질 수 있는 장점들도 있는데 말이다. 결국은 부모와의 관계 형성의 문제가 외동아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열쇠이자 양육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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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둥이네 가족의 가정교육은 어떠해야 할까?
딸 둘과 아들 둘을 키우는 다둥이네 가족은 저녁시간이 늘 부산스럽다. 맞벌이 엄마 아빠의 부담감은 저녁 밥상에서 극한에 달한다. 먹성이 좋은 아이들이라 찬거리 준비와 밥상 차리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첫째부터 막내까지 나이 차이가 거의 띠동갑에 이르다 보니 아이들의 연령과 선호도에 따른 입맛 맞추기도 쉽지 않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그 스펙트럼의 다양성에 부모는 가끔씩 멘탈 붕괴의 상황에 직면한다.
“자기 먹을 수저는 똑바로 놓고, 맛있는 반찬은 혼자 차지하지 말고 사이 좋게 나눠 먹자. 식사가 끝나면 최소한 자기 밥그릇은 스스로 설거지 통에 넣고. 가끔 자발적으로 설거지도 하고 자기 방 정리도 해보는게 어때? 숙제와 공부는 제발 알아서 하자. 부디 싸우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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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말해도 메아리 없는 독백에 그친다. 아이들의 방은 정리와는 거리가 멀었고, 밥상에서는 까다롭고 어려운 손님처럼 행동했다.
‘저마다 숟가락을 하나씩 물고 태어났다’고 말씀하시던 예전의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쉽게 키웠다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 밥벌이의 피로와 육아의 고통이 충돌할 때 아무도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특히나 아이들 숫자가 많다 보면 그 성향과 요구사항의 다양함에 여러 번 놀란다. ‘질풍노도’의 중2도 어떤 아이는 무난하게, 다른 아이는 까칠하게, 또 다른 아이는 속상하게 지날 때 부모의 갱년기는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다둥이네 부모가 선택한 해결책은 아이들의 고유 영역과 책임감을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스스로 해야 하는 주체적인 영역을 정해주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결과에 책임지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 대상은 아이들의 공부부터 밥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부모는 학교생활이나 사교육에 되도록 관여하지 않았다. 학원 등 공부와 관련된 문제는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올바른 생활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공부방 정리 정돈과 밥상에서의 뒷정리 습관 등은 강조했다. 그러나 직접 개입하는 건 최소화하면서 아이들의 능동적인 결정과 참여에 의미를 부여했다.
극적인 전환은 없었지만 서서히 아이들의 행동에 변화가 있었다. 주체적으로 결정하도록 유도하니 아이들끼리 상호 경쟁하면서 밥상과 거실, 공부방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잔소리를 하는 횟수가 줄고, 오히려 아이들 사이에서 나름의 질서와 형제애가 생기면서 부모가 수고를 더는 경우도 많았다. 부모님의 귀가가 늦을 때면 큰 아이들이 동생들의 저녁식사나 공부를 챙겼다. 유무형의 무언가를 나눌 때에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적정의 밸런스를 찾기 위해 서로 합의점을 모색해보도록 했다. 자신의 의견을 내고, 각기 다른 입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하니 자신의 몫에 대한 책임감과 서로를 배려하는 태도가 생겼다. 물론 이러한 합의 과정에서 아이들 간의 갈등이 있을 때는 부모의 시기 적절한 중재가 필요했다.
여전히 공부방과 거실에 옷가지들이 널려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스스로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과 의지가 집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아이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집 전체 분위기는 눈에 띄게 밝아졌고, 우리의 육아 스트레스는 크게 줄었다. 여전히 아이들의 교육(비용)과 미래가 걱정이지만, 네 명의 아이들이 제각기 커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두렵지는 않다. 아마 계속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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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숫자에 따른 바람직한 교육방식이 존재할까
자녀의 수에 따른 양육 방법에 대한 다양한 책이 있고, 특히 외동이라는 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 많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외동아이를 기르는 비법은 형제자매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방식과 크게 차이가 없다. 대부분은 외동이라서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나 특성을 보완할 수 있는 부모들의 역할을 주문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둥이 가족도 마찬가지다.
외동이냐 다둥이냐의 차이보다는 오히려 ‘부모’라는 변수가 훨씬 중요하다. 교육방법의 차이는 부모들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농도 차이가 아니라 방향과 방식의 차이다. 부모들이 어떻게 가정 내 환경을 만들고, 아이 혹은 아이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따라서 아이들의 현재가 생성되고 미래가 바뀌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아이들은 우리 부모에게서 왔으나 부모의 것이 아니기”에, 부모는 아이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이끌기보다 아이가 가진 고유한 특성을 살피고 아이를 존중하며,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그 결정에 책임질 수 있는 주체성을 인정해야 한다. 외동이든 다둥이든, 이런 태도로부터 비로소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자녀교육, 그리고 부모와 아이의 좋은 관계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
아기를 만날 날을 기다리는
예비부모님과 이미 치열하게 육아를 하고 있는
모든 부모님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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